2020. 1. 30. 17:27ㆍPower
이토록 유쾌한, 70대 여성들의 우정과 일이라면
나이 먹는 것 방어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70대에 싱글이 되라니! 그레이스(Jane Fonda 제인 폰다 분)와 프랭키(Lily Tomlin 릴리 톰린 분)는 같은 날 각각 날벼락 이혼을 통보받는다. 사업 파트너로 일했던 두 여성의 남편들이 알고 보니 20년 동안 사랑하는 사이였단다. 70대에 남편이 게이라는 걸 알게 된 아내들은 해안가 별장에서 '어쩔 수 없이' 룸메이트로 함께 살게 된다. 문제가 하나 있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성격부터 취향까지 모든 면에서 상극이라는 점이다.
화장품 회사 CEO 출신 그레이스는 하이힐과 멋진 드레스를 걸친 채 공화당 연례행사에서 마티니("드라이하게, 올리브 추가!")를 홀짝일 것 같은 인물인 반면 프랭키는 왕년에 피켓 시위 좀 해본 히피 예술가다. 좀처럼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은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70대 여성들의 좌충우돌 일상을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Grace and Frankie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노화와 신체기능 저하(무릎 통증, 허리디스크, 뇌졸중, 심장마비, 건망증···많기도 하다!), 세대 차이, 노인 차별, 은퇴, 존엄사 등 인생 후반부에 부딪힐 다양한 문제를 재치 있고 사례 깊게 그린다.
한편, 제작진은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모험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그동안 미디어가 실패공식으로 여겼던 바로 그 일을 하기로 한다. 노년 여성 캐릭터에게 '섹슈얼리티'와 '일'을 되돌려준 것이다.
일하는 노년 여성들은 어디에 있을까
미디어에서 중·노년 여성은 독특한 위치에 놓인다. 30살 삼순이를 노처녀로 부르던 시절보단 진일보했지만, 여전히 마흔에는 뭔가가 있나 보다. 40세가 된 여성 캐릭터에게는 '송마흔'이라는 예능 자막이 붙고, 50대가 되면 젊고 매력적인 여성 역할일 때 주어졌던 섹슈얼 텐션과 멋진 직업은 홀랑 가져가 버리더니 갑자기 남편과 아이를 안겨 준다. 뉴스와 시사 부문에서는 더 참담한 수준이다. (40·50·60대 세 명의 여성 진행자를 내세웠던 KBS <거리의 만찬>은 그만큼 상징성이 있었다.)
박막례, 밀라논나 할머니 등 노년 유튜버들의 약진이 돋보이지만 아직은 대안적인 수준이다. 노년 여성을 향한 문화적 묘사는 천편일률적이고 심지어 형편없다. 주류 미디어가 여전히 몸을 사리는 상황에서 '여성의 성적 쾌락'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충분히 누리고, 또 다른 여성들도 기꺼이 그러길 격려하는 할머니 캐릭터라니. 어찌 밀레니얼 세대가 그레이스와 프랭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레이스와 프랭키가 이혼 후 잃었던 제 리듬을 되찾기 위해 처음 시도한 건 일거리를 얻는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딸에게 물려준 옛 회사에서 자리를 찾으려 했고(실패), 프랭키 역시 미술 교사 구인 광고를 눈여겨본다(역시 실패).
세상과 가족이 지랄맞게 구는 상황이지만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레이스에겐 사업 수완이, 프랭키에게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두 여성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오른쪽 참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Mic drop!) 손목 관절이 약한 중년 여성 전용 바이브레이터를 개발해 승승장구하고, 최근 공개된 시즌 6에서는 두 번째 사업(역시 무릎이 약한 중년 여성을 위한)을 시작한다.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서 일은 경제적 자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남편과 함께했던 지난 40년 중 절반이 거짓말이 된 상황에서 이들은 일을 통해 자신감, 소속감, 그리고 충만한 삶을 되찾았다. (물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일에 과몰입하는 그레이스는 종종 선을 넘을 때가 있긴 하지만.) 전 남편 솔과 로버트 역시 로펌 은퇴 후 LGBTQ 운동가(달리기가 느려 조금 불리한)와 지역 뮤지컬 배우에 도전한다. 네 명의 노년 캐릭터는 단조로워지는 일상에 볼륨을 주는 것, 그게 노년기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시청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왜 밀레니얼 세대는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 빠져드는가
제인 폰다와 릴리 톰린은 실제 삶에서도 무수히 많은 여성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둘은 기념비적인 영화 <Nine to Five 나인 투 파이브>(1980)에 함께 출연한 후 40년 동안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83세인 폰다는 극중 캐릭터와 달리 실제로는 열정적인 진보 운동가다. 수십 년 동안 생식권부터 동일임금까지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보탰고, 지난해 말부터는 매 금요일마다 기후위기 시위 <Fire Drill Fridays> 현장을 찾고 있다. 동성애자인 81세 톰린 역시 페미니즘과 성 소수자 인권운동에 평생을 헌신해왔다. 드라마 속 메시지를 현실로 확장하는 폰다와 톰린만큼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 적합한 인물은 또 없을 듯하다.
누군가는 <그레이스 앤 프랭키>가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트위터에서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거나 (어르신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담하게 하룻밤 불장난을 하는 노년 여성을 우리 주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드니 그런 평가도 무리는 아니다. 분명한 건 지금 7080 여성들에게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저 딴 세상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현대 젊은 여성들에게는 미래이자 현실, 현실이자 미래라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20~30대는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통해 막연한 미래가 아닌, '매우 현실 가능성이 높은 미래'를 미리 맛본다. 밀레니얼 세대가 70~80대가 되는 2070년에는 더 오래 일하는 여성, 더 많은 비혼 여성, 더 많은 성적 자율성을 누리는 여성을 (이성애자 백인 중년 남성만큼) 미디어와 현실에서 많이 볼 수 있을 테니.
시리즈를 관통하는 값진 메시지, "Co-independent"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시즌 4를 공개할 당시 "Co-independent"라는 단어를 내걸었다.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독립적인 삶을 '함께' 만들어나간다. 두 인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적확한 단어가 또 있을까. 우리에겐 눈물 나게 웃긴 그&프같은 우정, 그리고 더 많은 일하는 여성 모델이 필요하다. 다음에 소개할 사람은 그&프만큼 웃기고 멋있는 어느 60대 여성이다. 이번엔 바다 냄새 대신 잉크 냄새나는 뉴욕의 한 사무실로 가볼까.
Dear 일(Work), You complete me.
1952년생 메리 노리스(Mary Norris)는 미국 시사 주간지 <The New Yorker 뉴요커>의 책임 교열자다. (구두점에 예민해) Aka 콤마퀸으로 불린다. 42년차 현역 베테랑 교열자가 쓴 첫 책 <뉴욕은 교열 중>은 일에게 바치는 일종의 연애편지다. 그것도 무척 웃기도 사랑스러운 편지가 될 거라는 건 첫 문단을 읽자마자 직감할 수 있다.
필립 로스, 노라 에프런, 제임스 설터 등 미국 최고 작가와의 작업(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내가 그 글을 읽으면서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한다), 교열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현대인의 끔찍한 문법 실수, <뉴요커> 직장 문화와 사무실 뒷이야기 등 활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좋아할 만한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메리 노리스라는 인물 그 자체다.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글'을 주제로 '글'을 쓰는 60대 교열자 겸 작가라니. (글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 어른+교열자+작가 조합 이 둘 모두에 고정관념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재치 있고 때론 짓궂다. 다른 것도 아닌 직장 이야기를 누가 이렇게 유쾌하게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직장의 신이다.
Independent Women의 삶
"글쓰기를 제외하면 나는 또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을 심각하게 한 적이 없다" 는 그가 자신의 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책을 읽어가는 내내 독자는 느낄 수 있다(부러울 정도다). 그에게 일은 곧 자아 탐구이기도 하다. 노리스처럼 진정한 덕업일치(?)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삶을 충만하게 해주는 그 무언가를 찾는 것은 현대인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노년도 예외가 아님을 우리는 이미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통해 확인했다. 꼭 Job이 아니어도 된다. 운이 좋으면 평생 이어갈 수도 있을 테고, <그레이스 앤 프랭키> 속 네 명의 어른처럼 은퇴 후에 뜻밖의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
먼 60대를 상상하는 게 아직은 어색하다. 굳이 일에게 연애편지를 바치고 싶지는 않지만, 일 년에 몇 번 "You complete me"라며 애정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을 듯싶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어찌 알겠냐만 우선 60세가 될 때까지 <뉴욕은 교열 중>이 내 책장을 떠나지 않을 건 확실하다. 다음으로 <프렌즈>와 <그레이스 앤 프랭키> 둘 중 어떤 걸 더 정주행하고 있을지는···거기까진 나도 모르겠다! (<프렌즈>는 도대체 언제쯤 질릴 것인가?)
이토록 유쾌한, 중년 여성의 우정과 일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이 드는 게 마냥 걱정스럽지는 않다. 그레이스, 프랭키, 메리 노리스. 미래의 나는 이 멋진 어른 여성들처럼 될 수 있을까? 부디 제게 더 많은 체력, 재력, 재치와 더 적은 무릎 통증을 주소서!
* 책 인용문은 따옴표 속 기울기체로 표기했습니다.
글 | 1층 오리너구리(1fbooksto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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