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9. 19:15ㆍPower
내 탓이 아니야! 아담 샌들러 탓이야
기대도 안 했는데 너무 맛있었던 이국적인 음식 하나쯤 있으시죠? 십 대들의 '사적인 고민'을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Sex Education)는 예상보다 훨씬 근사했던 그런 이색 요리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외국 드라마라서 그런 게 아니라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장르 공식에서 한참 벗어난, 일종의 '별종'으로 불릴 만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10대 남자아이를 주인공으로 세운 섹스 코미디 장르에서 어린 아담 샌들러와 세스 로건, <How I Met Your Mother>의 바니(닐 패트릭 해리스 분) 대신 ‘시대정신’을 발견할 거라곤 전혀 짐작하지 못했는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듯합니다. 우리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시시덕거리며 교실 책상 위에 영단어 세 글자를 고이 적고 있는 초등학교 남자아이 갱스터들(한 손에는 피카츄 돈까스)을 떠올리게 하는 민망한(사실상 애잔에 가까운) 대사를 '스물' 안팎의 성인 남성들이 쏟아내는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10대-20대 초반의 섹슈얼리티와 성적 다양성을 '대상화 없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그린다는 건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일일지도 모릅니다.
극 전개상 필요했지만 오프닝 시퀀스치곤 꽤 수위가 높았던 첫 장면은 이제 보니 선정적이라기보다 '선언적'인 듯합니다. 시청자들의 불순한(?) 속마음을 꿰뚫듯 허를 찌르고 시작하는데 제작진의 이런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넨 이런 걸 기대하겠지? 옛다! 하지만 이게 전부일 거야.’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얼마나 현실적일까?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의 매력 중 하나는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나옵니다. 과연 드라마 속 소녀들의 삶은 현실과 얼마나 닮았을까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미디어 비평가인 페기 오렌스타인이 쓴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질문들>의 원제는 <Girls&Sex : Navigating the Complicated New Landscape>입니다. "십 대 소녀들과 섹스에 대해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하지만 반드시 물어봐야 할)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거 에이미, 저기 메이브!’ 할 정도로 드라마 캐릭터들이 생생히 떠오르실 겁니다(반대의 경우도. 저는 작년에 읽는 이 책이 드라마 보는 내내 떠올랐습니다). 워낙 저자가 이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 책 역시 드라마 기획 단계에서 분명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됐을 듯합니다. 그만큼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단순 허구가 아닌, 성에 대한 십 대들의 고민과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와 대중매체가 소녀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해 온 페기 오렌스타인은 이번엔 '소녀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습니다. 15세에서 20세 사이의 미국 여성 70여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인종, 정치 성향, 가정환경 등 배경 면에서 다양한 인터뷰 대상을 선정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대학 진학을 계획하고 있거나 현재 대학생 신분으로, 소위 튀는 아이나 문제아가 아닌 교육면에서 혜택을 받은 '보통의 십 대 여학생'이라는 점 역시 짚고 가야 합니다. 드라마는 영국을 배경으로, 책은 미국 십 대들로 한정돼 있어 주로 영미권 문화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소 문화 차이는 있겠지만 그 안의 고민은 지역을 충분히 초월하고도 남습니다. 물론 십 대와 다를 바 없는 말 못 할 고민을 가진 전 세계 20~30대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안입니다.
본격적으로 드라마 속 캐릭터와 현실의 소녀들이 말하는 "친밀한 신체적 접촉에 대한 태도, 기대감, 최초 경험들"을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불온한 마음은 빼고 갈 준비 되셨겠죠?
성교육의 공백을 채우는 2가지 방법 - 포르노를 따라 하거나 상상에 맡기거나
강렬했던(?) 첫 장면 기억하실 겁니다(부디 출퇴근길에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으셨길). 애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에이미가 내뱉은 말도 생각나시나요? 첫 오작동에서는 "내가 뭐 잘못했어?” , 두 번째 오작동에서는 “내가 그렇게 별로야?"
에이미는 '대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본은 물론 포르노에서 나올 법한 대사들로 채워졌고요. 에이미에게 섹스는 일종의 퍼포먼스입니다. 페기 오렌스타인(이하 페기)에 따르면 "어린 소녀들이 '섹시하다'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장난 삼아 '섹시함'을 흉내 낸다면, 아이들은 섹스가 감정이 개입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페기가 인터뷰한 캘리포니아 북부에 사는 한 고등학교 3학년생의 고백은 에이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이미는 (이성을 만난 이래로) 자기에게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스스로도 자신의 신체적 욕망과 쾌감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포르노에서는 그렇게 했거든요. 상대방이 원하는 걸 묻고 들을 준비가 된 새 남자 친구 스티브를 만나기 전까지. 연기를 들켜 당황스러운 에이미는 당장 비밀 상담소를 찾아갑니다. 오티스는 ‘여성이 남성보다 자위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금기시한다’며(같은 고민을 가진 오티스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혼자 할 때 네 몸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알아보면 연기가 아닌 진짜 섹스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훌륭한 조언을 합니다. 그 조언을 따라 에이미는 스스로의 몸을 탐구했고, 경이로운 ‘진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매우 구체적으로! 요구하며 마침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진정으로 즐기게 되었습니다.
다소 엉뚱한 릴리는 자신이 창조한 SF 캐릭터 글레녹시처럼 하루빨리 성적 모험을 시작하고 싶지만,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해 계획이 매번 수포로 돌아갑니다. 사실 릴리가 그토록 서두른 진짜 이유는 '경험 없는 괴짜' 취급이 두려워서였죠. 페기가 인터뷰한 학생들도 ‘섹스 안 한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 건 뒤처지는 일이며, 인기 없고 자신감 없는 괴짜 처녀 이미지로 굳어질까 봐’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채 급하게 성경험을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빌보드 노래 중 92% 이상이 섹스를 주제로 하고 술집에 가다가, 술집에서, 술집을 나온 후 눈 맞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미권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조바심 나는 그 마음이 이해 갑니다. 미디어의 영향으로 젊은 세대는 자기 또래의 성생활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Alissa Skelton, “Study: Students Not 'Hooking Up' As Much As You Might Think”, USA today, 2011.10.5). 이 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오티스는 릴리에게 어쩌면 가장 필요했던(혹은 오티스 본인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물론 하는 애들도 있지만 대개는 아직 아니야. 그리고 이건 경쟁이 아니야."
성적 대상화의 늪, 포르노화한 미디어
성적 대상화의 늪
우리의 메이브는 '복잡한 여성 캐릭터'입니다. 메이브는 셰익스피어를 다각도로 분석할 줄 알고, 14살부터 여성주의 서적을 탐독해 온 똑똑하고 당찬 학생이죠. 사적인 관계에서도 주도적입니다. 무어데일 학교 남자아이들은 릴 웨인의 <Love me> 가사에나 나오는 형편없는 비속어로 메이브를 부르며 언어 성희롱을 일삼습니다. 물론 메이브는 이들을 가만두지 않는데요. 당차게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가운데 손가락을 올립니다. 생일파티에서 또래의 키스를 거절한 후부터 메이브는 각종 헛소문과 여성비하 단어를 4년 동안 들어오면서 누구보다도 깊은 성적 대상화의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요즘 잠잠한 한국 힙합계 소식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차트에서 여성비하 단어 없는 힙합곡 찾기'에 도전해봤는데요. 멜론 국내 랩/힙합 차트에 들어가 최신곡 클릭. 오늘은 6번째 곡에서 멈췄군요. 오늘은 T**t라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슬랭을 알고 갑니다. 확실히 B**ch는 이제 그들 사이에서 식상해진 게 분명합니다. )
회유와 강압에 의한 섹스팅(야한 문자나 사진을 주고받는 것)도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부 남자아이들은 여자 친구들의 신뢰를 교묘하게 이용해 노출 사진을 요구합니다. 끈질기게 요구하고 징징거리며 때로는 협박을 하면서.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서도 마치 트로피처럼 학교 여자아이들의 노출 사진을 모으는 조연 캐릭터가 등장했었죠.
섹슈얼리티와 성적 대상화의 아슬아슬한 경계
페기가 만난 여학생들은 "처녀와 걸레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따라 걷는 것", "섹시하지만 난잡하게 보이지 않도록, 성에 무관심해도 궁해 보이지 않도록 보여야 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토로합니다. 성적 대상화와 섹슈얼리티는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이제는 그 구분이 쉽지 않다고 페기는 말합니다. 킴 카다시안의 엉덩이는 분명 과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비욘세, 니키 미나즈, 제니퍼 로페즈의 엉덩이는 '섹슈얼리티의 당당한 표현'인지, '자기 대상화(Self-objectification)'인지 도통 모르겠고, 매일 쏟아지는 엉덩이 사진에 여학생들은 헷갈려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자기 대상화는 섭식 장애, 우울증, 신체 감시(오티스 역시 본인의 몸이 징그럽다고 느껴져 섹스를 할 때 불을 안 킨다는 고객을 상담했습니다)는 물론 위험한 성적 행동, 성적 쾌락 감소에까지 상당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Oh my gosh, look at her butt"을 반복하는 니키 미나즈의 싱글 앨범 <아나콘다>의 커버와 트워킹은 HBO 드라마 <걸스> 주인공 리나 더넘의 가슴 노출과 같은 선상에 있을까요? 성 해방과 저항의 상징일까요, 성상품화일까요?(페기는 이에 대한 답을 했고, 인터뷰했던 한 여학생은 페기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포르노화한 미디어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나라 학교 성교육이 현실과 괴리돼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습니다. 부족한 성 지식은 대개 온라인을 통해 얻는데 상당수 남자아이들에게는 포르노가 성교육의 공백을 채워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상대적으로 포르노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주로 상상으로 그 공백을 채웁니다.
문제는 지식, 현실 인식 등 여러 면에서 불균형이 생긴 상태로 이들이 만났을 때 발생합니다. 포르노로 습득한 잘못된 지식과 왜곡된 성 인식은 특히 소녀들에게 상처, 더 나아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에는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포르노에 미친 남자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런 남자들은 핫한 여성을 차지하려고 안달이 난 코미디 영화와 드라마에서 충분히 질리도록 봐왔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은 포르노로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몇몇 키워드를 검색하면 십 대들도 성인 인증 없이 포르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주 고객인 남성들이 짧은 시간에 최대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포르노 제작자들은 그 수위를 점점 높여갔습니다. 폭력성이 강한 포르노물은 어린 세대에게 왜곡된 성인식을 심어주고 성인지 감수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바입니다. 페기는 '대중문화가 포르노 문화로 변해가고 있다'며 포르노에 중독돼 현실에서 무감각해져 버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돈 존>의 극본, 감독, 주연을 맡은 조셉 고든 레빗의 말을 인용합니다.
포르노라는 말 대신 ‘야동’이라는 단어로 음란물 소비를 그저 가볍고 웃긴 에피소드처럼 취급하는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까요? 어른들은 '요즘 것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죠. '세상이 말세다, 말세!' 그 말세는 누가 만들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훅업 문화에서 남녀는 평등할 수 있을까?
잭슨과 메이브는 훅업(Hook-up)으로 시작된 관계입니다. 훅업은 데이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담 없는 성적 접촉'부터 시작하는 만남으로, 키스부터 섹스까지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10-20대들의 훅업 문화를 분석한 사회과학 서적이 여러 권 나올 정도로 틴더와 같은 데이팅 앱으로 상징되는 훅업은 서구에서 분명 주류 문화가 되었습니다. 페기는 캐주얼 섹스 개념이 생긴 건 최근의 일이 아니지만, 캐주얼 섹스를 즐기는 연령층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건 분명한 변화라고 분석합니다.
페기는 훅업에 대한 여학생들의 솔직한 생각과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기분 좋은 훅업'에서부터 '즐거운 스킨십이 성폭력으로 변한 순간'까지. 그리고 페기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게 됩니다. '과연 훅업에서 남녀는 평등할 수 있는가'
데이트에 대한 정의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훨씬 크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으며, 특히나 훅업과 같은 만남(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결여된)에선 더 높은 확률로 그렇겠죠.
데이트가 아닌 훅업으로 관계를 시작한 메이브와 잭슨. 안전하게 피임 도구를 썼지만, 알려진 대로 콘돔은 늘 완벽하게 안전하진 않았고 결국 메이브는 임신을 합니다. 훅업의 결과는 잭슨과 메이브에게 동등하지 않았습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청소년들이 자유롭고 건강하게 섹슈얼리티를 즐기되, 그 결과와 책임 면에서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 듯합니다. 임신과 낙태 등 미디어가 흔히 놓치는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 2편에 계속 -
* 책 인용문은 따옴표 속 기울기체로 표기했습니다.
글 | 1층 오리너구리(1fbooksto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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