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6. 07:05ㆍPower
당신의 1-2-3단계는? 스킨십 정의는 당신의 세대를 말해준다
스킨십은 저마다의 속도와 기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요즘엔 이렇다 저렇다 속단하긴 힘들 겁니다. 그런데 페기가 10대를 인터뷰하면서 (본인 세대와 비교해) 크게 세대 차이를 느꼈던 부분 중 하나가 오럴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연구 자료, 미디어에서의 묘사, 인터뷰 등을 종합해 볼 때 미국 십 대들 사이에서 오럴 섹스가 상대적으로 보편화한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합니다. 정식 개소한 오티스 상담소의 첫 고객 올리비아도 방법론(?)에 대해 고민을 털어놨었죠.
여학생들의 의견은 다양했습니다. ‘즐거움’에서 ‘부담감’, ‘역겨움’까지 아주 다양한 단어가 튀어나왔죠. 솔직하고도 놀라운 이야기를 듣던 중 페기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택권은 과연 누가 가지고 있느냐’
통계 1.
"미국 중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오럴 섹스의 결과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결과,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에 비해 오럴 섹스 후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대답할 확률이 두 배나 높았으며, 여학생들은 이용당한 기분이 든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세 배는 높았습니다(Brady and Halpern-Felsher, Adolescents Reported Consequences of Having Oral Sex and Versus Vaginal Sex)”
통계 2.
“여학생들이 Oral Sex를 하는 진짜 이유는 성병 예방이 아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여학생들이 Oral Sex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거의 4분의 1에 달하는 여학생들이 이런 대답을 했으며, 같은 대답을 한 남학생은 약 5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친밀한 스킨십에 있어서 분명 남녀 사이에 비대칭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일 텐데요. 고민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면, 성 권력이 뒤집힌 세계를 그린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에서 스쳐 지나갔던 한 대사를 들려주고 싶네요. “선택권은 항상 있어”
오럴 섹스가 미국 십 대 사이에서 보편화된 원인으로 빌 클린턴 스캔들, 성혁명, 맞벌이 부모의 방임 등이 학계에서 제기됐지만, 페기가 보기에 이들은 단순한 해석으로 보였습니다. 그녀는 보수 진영의 금욕 성교육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참고로 금욕 성교육의 효과에 대해선 문화권별로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는 미국에서 조사된 내용입니다).
통계 1.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의무화된 금욕 성교육 프로그램은, 성관계를 하면 순결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에이즈의 위협을 명분 삼아 성관계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주입시켰다. 이에 따라 청소년들이 찾아낸 부분적인 해결책이 오럴 섹스였다… 다양한 연구를 통해 살펴보면 신앙심이 깊은 대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오럴 섹스는 ‘섹스’가 아니라고 대답할 가능성이 높았으며, 십 대 청소년의 3분의 1 이상이 오럴 섹스를 해도 ‘금욕’을 깨뜨리는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통계 2.
" 부모와 교육자들이 Oral Sex를 무시해왔기 때문에 십 대들 사이에는 Oral Sex가 위험하지 않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그 결과 지난 30년간 삽입 성관계와 임신 비율은 하락한 반면, 성병 감염 비율은 감소하지 않았다. 매년 처음으로 성병 진단을 받는 환자 중 절반이 십 대 청소년과 갓 성인이 된 이들이며, 특히 여성 성병 감염자의 대다수가 젊은 층이다”
생각나는 드라마 속 캐릭터가 있으시죠? 낙태 클리닉 앞에서 반대 시위를 하던 기독교 신자 여자아이가 오티스에게 들려줬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Behind the Scenes. 애매한 경계선에 서 있는 소녀들
이제 드라마 밖의 현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페기는 왕왕 데이트나 훅업에서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게 됐던 소녀들의 경험담을 들었습니다. 긴가민가하는 회색지대에서 주춤하다 순식간에 데이트 폭력에 노출되는 소녀들. 더구나 신뢰 관계에 있던 남자 친구가 갑자기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거나 요구했을 때 아이들은 헷갈리게 되는 거죠. ‘무슨 뜻이지? 내가 제대로 해석한 건가?’ , ‘거절하면 상처 받을 것 같은데…’
직접적인 거절이 상대방에게 불편함과 상처를 줄까 봐 걱정하는 여자아이들, 데이트 폭력에 단호하게 나설 수 없는 상황을 잘 알았던 임상 심리학자 로렐라이 심슨 로는 젊은 여성들에게 거절하는 '기술'을 가르치고자 데이트 폭력 가상현실 시뮬레이션 프로그램(Sexual assertiveness training with the goal of helping them resist unwanted sexual overtures)을 개발했습니다.
확실한 의사표현과 자기변호는 꼭 필요한 방어기술
"성폭력은 100% 가해자들의 책임"임을 분명히 하면서도, "여성들이 일반적인 성적 교류를 하다가도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는 행동으로 신속하게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로렐라이 교수는 강조했습니다. 데이트 폭력 위험 신호를 알아채고 대응할 수 있도록 돕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한 고등학교 여학생들은 어땠을까요? 자신 있게 웃으며 시작한 학생들. 그러나 로맨틱한 데이트 현장이 강압과 폭력의 현장으로 변하자 여학생 참가자들은 남성 아바타 앞에서 몸이 굳은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가상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요.
거절하는데도 계속 요구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는 남자들 앞에서 여학생들은 당황하게 되는 거죠. 이들은 애원 또는 감언이설 같은 교묘한 기술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청소년 성 상담가인 캐리슨 데니슨은 '몸에 배어버린 상냥함'을 언급했습니다.
데니슨의 수업을 직접 참관했던 페기는 캐리슨 데니슨이 이 말을 하는 순간 “마치 교실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교사에게 아픈 곳을 찔린 학생들이 다들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라고 기억합니다.
두루뭉술한 성교육은 여자 아이들에게 훨씬 위험하다
페기는 두루뭉술하고 폐쇄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위기 상황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며 ‘솔직한 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미국에서 금욕 성교육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미국 정치권이 어떤 식으로 사적 공간에 관여해왔는지를 고찰하며 그 근거를 제시하죠.
이 책은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페기는 한 남학생의 이야기를 꼭 집어넣고 싶었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청소년 상담가의 강의실에서 만난 남자아이입니다. 수업이 끝난 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학생들이 남았고, 가장 마지막으로 말을 건 한 남학생. 여자 친구가 성관계를 갖자고 조르는데 자기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고민을 털어놓자 캐리슨 데니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티스!
우리에겐 오티스가 없지만
지난밤 꿈에 여자 사람 친구가 나오자 "내 뇌가 걜 대상화했어!"라며 나쁜 놈이 된 기분이라고 자책하거나, 힘든 결정을 하고 온 친구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하는 남자는 SF 판타지에 가깝죠. 물론 오티스도 실수를 합니다. 신체 사진이 퍼진 루비의 의뢰에 메이브가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댄스파티에선 파트너 올라 앞에서 그녀와 메이브를 각각 염소(싫으면 집고양이. 선택지도 주다니!)와 사자에 비교하는 엄청난 말실수(제발 입다물어!!)를 하고 맙니다.
"메이브는 내릴 수 없는 섹스 회전목마 같다"는 잭슨에게 오티스는 "걔는 물건이 아니야. 무슨 무생물인 것처럼 말하는데 걔도 사람이야"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동안 섹스 코미디 속 10대 남자 캐릭터가 해 온 대사는 분명 아니었죠. 당연한 얘기가 이렇게 신선하게 들릴 줄이야.
또래 남자들의 어쭙잖은 조언과 그걸 충실히 따르는 멍청하고 유해한 캐릭터들의 입지는 확실히 좁아질 듯합니다. 시청자들은 이미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라는 신선하고 건강한 이국 음식을 맛봤기 때문입니다. 펑크 뮤직, 블랙 유머, 버지니아 울프와 록산 게이. 메이브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이토록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오티스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고 진정한 첫사랑을 이룰 수 있게 될까요?
우리에겐 오티스가 없습니다. 사적인 고민을 털어놓을 만한 마땅한 곳과 사람이 없어 외로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죠. 다정하고 눈높이를 맞춰 줄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는 없을지 몰라도, 우리에겐 페기 오렌스타인이 있습니다. 하나의 우주을 담은 이 책을 되도록 많은 소녀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고요. 고등학교 혹은 대학 신입생 필독서로 지정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독교 단체와 학부모 협회의 엄청난 비난과 오해(?)를 감수해야 하겠지만요!
P.S. 페기가 소녀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
진정 어린 마음이 느껴졌던 책 마지막 문단을 적어보겠습니다. '친밀한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페기 오렌스타인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어요!)
진짜 마지막 P.S. ‘궁극의 이상형’
핫가이 + 빅토리아풍 유령 = 라이언 고슬링
* 책 인용문은 따옴표 속 기울기체로 표기했습니다.
글 ㅣ 1층 오리너구리(1fbookstor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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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포인트] 가장 원시적인 동물 중 하나인 오리너구리는 조개, 가재, 그리고 '좋아요♥'를 주식으로 한다. 오리너구리를 살리려면 '좋아요'를 던져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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